흔히 결혼을 일컬어 두 가족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각기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사문제로 고부간의 갈등이 있는 집안
다종교 사회인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일은 고난의 연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대대로 제사를 모셔 왔던 집안에 개신교를 믿는 며느리가 들어와서 제사를 거부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등 한국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굵직한 대하소설을 남진 조정래 작가의 아버지는 조종현 스님입니다. 조종현 스님의 유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개신교를 믿는 며느리를 얻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승려출신 아버지이기에 남길 수 있는 유언이 아닐까 십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환경과 문화가 합쳐지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은 문화공동체
같은 환경속에서 세월을 견디다 보면 문화적인 기호조차도 유사해지는 것입니다. 결혼이 쉽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문화적인 차이 때문입니다. 특히나 종교문제나 제사문제가 결부되면 문화적 이질감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며느리가 시집오는 동시에 시댁의 종교를 따르는 게 관행처럼 여겨졌던 게 사실입니다. 사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종교는 불교와 유교가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니 종교문제와 제사문제를 놓고 시시비비를 따질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이 된 후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늘어나면서부터 종교문제 때문에 부부간, 고부간의 갈등도 잦아졌습니다. 비록 무턱대고 개신교라는 이유로 제사를 모시지 않겠다는 이유로 며느리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으니 며느리의 '종교의 자유'도 존중해야 합니다.
황금률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저는 종교들이 말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윤리관을 일컬어 황금휼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누가볶음'등에서 나온 황금률은 불교나 유교경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함경'에는 "타인은 곧 나이고 나는 곧 타인이라고 생각하여, 나 아닌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라고 쓰여 있으며, '논어'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황금률은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그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느냐입니다. 신심 있는 종교인임을 자처하면서도 남의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사람은 바로 이 황금률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박수를 보내지만, 우상숭배의 계명을 들먹이면서 이웃종교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기독교들에게는 야유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라고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잡보장경'을 보면 부처님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느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제사를 모시는 것은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부모나 조상들을 기리는 행사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는 유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유한한 삶을 영원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기억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흙과 물과 공기의 일부가 되어 돌아갈지라도 그 사람의 생애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제사는 우리의 부모님, 조부모님의 존재를 기억하는 자리인 것입니다.